스타트업계에선 누구든 스펙을 다 떼고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에 없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그걸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고, 투자자의 자본을 얻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 전체가 건강해지는 거잖아요. 제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건 이 일을 통해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성장 자체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게 제 가슴을 뛰게 한다고 할까요?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난 2011년 10월 5일, 전 세계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한국의 미디어 역시 일제히 헤드라인으로 그의 죽음을 다뤘고, 그달 24일 출간된 전기 <스티브 잡스>는 각종 인터넷서점에서 역대 최고 일일 판매량을 기록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기업가의 한 사람일 뿐인 그의 죽음을 추모할까요?
모두가 스티브 잡스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니, 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티브 잡스가 남긴 기록을 읽고, 그가 나온 영상을 봅니다. 애플의 제품을 좋아하건 아니건 상관 없이 말입니다. 아름다움에 이끌리듯 탁월함에 이끌리는 건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벤처캐피탈리스트(VC) 한 킴에 주목한 건 그래서였습니다.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벤처캐피탈 알토스벤처스를 이끌고 있는 한 킴 대표는 ‘유니콘 감별사’로 불립니다. 이미 유니콘으로 꼽히는 블루홀·쿠팡·배달의민족에서부터 넥스트 유니콘으로 불리는 토스·직방·하이퍼커넥트까지 모두 알토스벤처스로부터 투자를 받았습니다. 한 킴 대표에겐 탁월함을 알아채는, 좋은 창업가를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겁니다.
좋은 창업가는, 탁월함을 만드는 사람은 뭐가 다를까요?
이 질문에 한 킴 대표는 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알토스벤처스는 장기 투자로 유명합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서비스 중심의 스타트업은 VC로부터 투자 받기 쉽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어렵게 투자를 받아도 투자자의 수익 실현을 위해 더 큰 회사에 인수되거나 기업공개(IPO)를 서둘러야 했습니다. 투자자가 곧 엑시트할 수 있는 정도의 단계가 아니면 투자 받기 어려웠다는 얘기이기도 하죠.
하지만 알토스벤처스는 성장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이라면 창업가가 엑시트하길 원해도 “더 투자할테니 조급해하지 말고 성장에 집중하라”고 요구합니다. 당장 돈을 벌기보다 회사가 더 크게 성장하길 원한다는 점에서는 창업가와 이해가 일치합니다. 창업가들이 알토스벤처스로부터 투자를 받고 싶어 하는 건 그래서죠.
“회사가 크게 성장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수익은 당장 수익화했을 때의 수익과 비교할 수 없어요. 작은 바퀴를 굴려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얼마 안됩니다. 하지만 그 바퀴의 지름이 조금만 커져도 앞으로 나아가는 거리는 지름의 커진 것의 몇 배 이상 길어지죠. 실리콘밸리 VC는 경험적으로 이걸 알고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투자를 합니다.”
알토스벤처스는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담보나 CEO의 보증을 요구하거나 자급 집행 내역을 관리하는 등의 창업가들이 VC업계 ‘갑질’로 꼽는 조건을 내걸지도 않습니다.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폐업한 스타트업이 밀린 임직원 급여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4억 원을 추가로 지원해준 적도 있습니다. 2016년 청산한 스타트업 리모택시 얘깁니다. 그는 “유니콘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자 실패나 손실은 당연한 것”이라며 “유니콘 기업을 만들면 그런 손실을 만회하고도 남는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단순한 투자자를 넘어 창업가와 함께 유니콘 기업을 만드는 파트너. 8번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한 킴 대표가 창업가를 도와 탁월함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알토스벤처스는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장기투자 원칙을 지키기 위해 ‘좋은 창업가’를 찾는 데 집중합니다. 창업가가 실현하려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도 중요하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한 킴 대표는 “우리가 좋아하는 창업가 유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업 아이템이 아무리 매력적이어도 창업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투자를 주저합니다. 반대로 창업가가 마음에 드는데 사업 아이템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으면, 기억해뒀다가 그 창업가가 다른 사업 아이템으로 다시 도전할 때 투자하기도 합니다.
“창업가가 중요하다”는 말을 주로 하는 건 엔젤투자자입니다. 서비스 아이디어가 얼마나 시장성이 있는지 즉, 제품·시장 적합성(Product-Market-Fit)을 찾기 전 단계에 투자하기 때문에 창업가와 창업팀을 볼 수 밖에 없죠. 이 단계에선 사업 아이디어가 바뀌는 일도 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알토스벤처스가 주로 투자하는 시리즈A 단계는 스타트업이 제품·시장 적합성을 찾아 본격적인 성장 단계에 들어섰을 때인 만큼 실제 성장하는 걸 증명할 수 있는 지표를 중요하게 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 킴 대표와의 8번의 만남에서 지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창업가에 대해 말했습니다. 우리가 창업가 한 명 한 명을 들여다보기로 한 건 그래서입니다.
그가 ‘더 좋은 창업가’를 강조하는 건 현재의 제품·시장 적합성을 증명할 지표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먼 미래를 바라고보, 큰 꿈을 꾸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짧게 투자하고 적당히 수익을 내는 게 아니라 길게 투자해 유니콘을 키우고 상상할 수 없는 수익을 만들려 하기 때문에 그는 ‘창업가’에 집착한다는 얘깁니다.
그렇다고 그가 오로지 압도할만한 수익을 내기 위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수익을 낼 수 있는 투자는 다양합니다. 주식에 투자해도 되고, 부동산에 투자할 수도 있겠죠. 비행기나 선박을 사서 항공사나 해운사에 대여해주고 수익을 내는 투자 모델도 있습니다. 그 많은 투자 시장 중 스타트업에 인생을 거는 건 이 일이 그의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엔 부정적이랄까요, 비관적이랄까요, 그런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자신의 한계를 긋는 사람들이죠. 나는 학벌이 이래서, 외모가 이래서, 가정환경이 이래서 같은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삶을 제한해버립니다. 그런데 스타트업계엔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아요. 이 바닥에선 누구든 그런 스펙을 다 떼고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에 없던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내고, 그걸로 소비자의 마음을 사고, 투자자의 자본을 얻죠. 그런 사람이 많아지면 사회 전체가 건강해지는 거잖아요. 경제만 좋아지는 게 아니라요. 제가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건 이 일을 통해 더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삶을 바꾸는 사람을 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성장 자체가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게 제 가슴을 뛰게 한다고 할까요?”
한 킴 대표의 이력은 여느 창업가 못지 않은 화려합니다. 1976년 초등학생이던 한 킴 대표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갑니다. 그리고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습니다. 한국인이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하는 건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의 입학 소식이 한인 교포 신문에 실렸을 정도죠. 하지만 졸업 후 군인으로 살면서 “위계적이고 꽉 짜여진 조직이 잘 맞지 않는다”는 걸 안 그는 전역을 결심합니다.
“미국에 가서 가장 놀라웠던 게 어떤 의견에 대해서든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문화였어요. 아시다시피 제가 미국에 갔을 무렵 한국은 반공 의식이 철저해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게 어려웠잖아요. 민주주의는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군인이 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어요. 공산주의가 없어졌으니 더 군에 남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군대를 떠났지만 그는 군대에서 많은 걸 배웠다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리더십입니다.
“소대장은 가장 먼저 죽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적 입장에선 지휘자를 제거하면 체계가 무너지지까요. 훈련할 때 감독하는 사람들이 소대장한테 말해요. ‘자, 너는 지금 죽었어’라고요. 그러면 그때부터 소대장은 아무것도 안합니다. 소대원들이 전투를 수행해요. 그리고 그 결과가 소대장의 성과죠. 리더십의 핵심은 리더가 없어도 중요한 결정이 일어나고 조직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정말 좋은 사람을 뽑아야 하고, 그 사람의 역량을 키우고, 스스로 의사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도 줘야 합니다.”
전역 후 한 킴 대표는 스탠포드 MBA에 진학합니다. 공산주의는 사라졌지만 민주주의가 살아남은 게 인간의 욕망에 기반한 경제 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비즈니스업계에서 일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정보기술(IT) 산업과 창업계에 가깝고 진취적인 학풍을 가진 스탠포드대에서 공부한 덕에 자연스럽게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게 됐고요. 구체적으로는 교수님 소개로 벤처 투자에 관심이 많은 기업인을 만나면서 1996년 알토스벤처스를 창업합니다.
1996년 창업한 덕에 한 킴 대표는 닷컴 호황 뿐 아니라 닷컴 버블 붕괴를 경험했습니다. 닷컴 버블 붕괴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킴 대표는 “조정기에 경쟁자가 정리되면서 구글과 아마존 같이 살아남은 기업은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탁월한 회사와 창업가를 발굴해 장기 투자하는 알토스벤처스의 투자 스타일은 바로 이 경험에서 나왔습니다.
한 킴 대표는 인터뷰 내내 “한국의 VC와 다른 경험을 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한국은 닷컴 버블 붕괴 후 네이버 같은 몇몇 포털 기업의 독과점 시장이 펼쳐졌고, 버블 붕괴기를 버텨낸 벤처기업 역시 오래 생존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한국의 VC가 서비스를 만드는 스타트업에 투자해 성공한 경험이 없는 게 당연했죠. 하드웨어 기반의 벤처기업 투자가 주류였던 이유입니다.
반면 한 킴 대표와 알토스벤처스는 실리콘밸리에서 아마존과 구글 같은 성공 사례를 보았기 때문에 모바일 시장이 열렸을 때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한 킴 대표의 성공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좋은 창업가를 발견해 더 좋은 창업가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 킴 대표는 ‘25개 도시론’을 늘 말합니다. 미국 내 인구수 상위 25개 도시와 국내 상위 25개 도시를 비교해보면 비슷하다는 겁니다. 실제로 국내 인구수 상위 25개 도시의 인구 합은 약 3600만 명으로, 미국 내 인구수 상위 25개 도시 인구(약 3790만 명)와 비슷합니다.
주목해야 할 건 인구밀도입니다. 이 25개 도시가 한국과 미국 국토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13.6%, 0.2%지만, 여기 사는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70.2%, 11.6%입니다. 한국의 인구수 상위 25개 도시의 인구 밀도가 더 높다는 얘기죠. 실제로 이들 도시의 면적과 합산 인구로 뽑은 밀도를 보면, 미국은 1㎢ 당 약 1960명인 반면 한국은 약 2600명입니다.
한 킴 대표는 말하죠. “미국에서 태어난 글로벌 서비스 중 인구 상위 25개 도시에서 모두 히트한 서비스는 없다”고요. 10개 도시 정도에서 히트를 하면 글로벌 서비스로 성장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한국의 주요 도시에서 성공했다면 글로벌 서비스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췄다는 얘기가 됩니다. 한 킴 대표가 “한국 시장이 결코 작지 않다”고 말하는 근거입니다.
한 킴 대표는 이 ‘25개 도시론’을 근거로 창업가들을 독려합니다. 유니콘 기업을 만들자고요. 당장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더 투자할테니 소비자를 더 모아서 서비스 규모를 키우자고 말입니다. 그는 한국에서 미국식 장기 투자 전략을 펴면서 유니콘을 만들어냄으로써 그의 ‘25개 도시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창업가를 글로벌 수준의 창업가로 만들고 있고요.
처음 한 킴 대표를 만났을 때 우리는 ‘탁월한 사람’을 알아채는 한 킴 대표만의 안목을 통해 탁월한 창업가들은 무엇이 다른지를 알아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한 킴 대표를 만나면서 우리는 그 스스로가 탁월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탁월한 사람들은 무엇이 다를까요?
한 킴 대표가 투자한 스타트업의 대표를 통해서, 그리고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한 킴 대표를 통해서 여러분은 그 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왜 한국인가’란 질문에 대한 사명감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벤처캐피탈(VC)인데, 미국 스타트업이 아니라 왜 한국 스타트업인가요? 미국이 태평양이면 한국은 동해 같은 느낌일 것 같은데 말입니다. 한국인으로서의 책임감 같은 게 있으셨나요?” 대장정에 가까웠던 8차례에 걸친 긴 인터뷰의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었다. 실제로 궁금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인프라와 네트워크가 없는 것도 아닌데, 글로벌 자본이 모이는 그곳을 놔두고 중국도 아닌 한국에서 투자를 한다니. 신기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이해가 잘 가지 않기도 했다. “한국인이라는 책임감 같은 게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런데 처음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죠. 처음엔 한국 시장이 투자할만한, 매력적인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주식시장에서도 글로벌 자금이 코스피에 투자하듯이요. 한국은 저력이 있는 나라죠. 짧은 기간 안에 글로벌 기업을 일궈낸 저력이요. 스타트업으로서도 해볼 만한 토양이에요. 높은 스마트폰 보급률 같은 인프라도 갖춰져 있고, 무엇보다 제가 주목한 건 인구 밀도에요. 한국만큼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가 많지 않죠. 미국에서 시작해 글로벌 서비스로 성장한 것들도 보면 미국 전역에서 히트한 게 아니라 인구 밀도가 높은 몇몇 대도시에서 성공했어요. 그 점에서 보면 한국은 스타트업이 초기에 비즈니스를 만들기에 충분히 매력적인 곳입니다.” -처음엔 한국인이니까 한국 스타트업에 투자해야 한다는 책임감 같은 게 없었다는 건 뒤집어서 지금은 있다는 건가요? “네, 지금은요. 그걸 저한테 심어준 게 장병규 블루홀 의장이에요.” 첫 인터뷰는 자연스럽게 장병규 의장과 블루홀로 옮아갔다. 알토스벤처스는 2008년 블루홀에 투자했다. 2006년 판도라TV를 시작으로 한국 투자를 시작한 뒤 사실상 의미 있는 두 번째 투자였다. 장병규, 그는 누구인가 한 킴 대표에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나아가 책임감까지 갖게 한 장병규 의장은 누구일까.
2화. 사심없는 정칙함...블루홀 장병규 의장(1)에서는 세 개의 챕터가 소개됐습니다. 1) ‘왜 한국인가’란 질문에 답하다 2) 장병규, 그는 누구인가 3) 사심 없는 정직함 ‘3화. 사심없는 정직함...블루홀 장병규 의장(2)’에서는 아래 세 개 챕터가 공개됩니다. 4) 블루홀 대표는 말단 엔지니어 사이에 앉는다 5) 한 킴의 눈에 비친 블루홀 6) Editor‘s Note 블루홀 대표는 말단 엔지니어 사이에 앉아 일한다 2007년 첫 만남 이후 장병규 의장은 알토스벤처스에 LP(Limited Partner·펀드 출자자)로 참여한다. 그리고 동시에 본엔젤스를 창업한다. 그리고 같은 해 게임회사 블루홀도 창업했다. 하나의 스타트업을 만들어 제대로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같은 해 두 개의, 그것도 전혀 다른 회사를 차린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건 장병규 의장이 ‘대표’가 아니라 이사회 ‘의장’이라는 자리를 맡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장병규 의장은 ‘게임 전문가’는 아니다. 네오위즈를 창업한 경험이 있긴 하지만 카이스트에서의 전공은 자연어 처리였고, 검색서비스 첫눈을 개발하기도 했다. 네오위즈 안에서도 채팅 서비스였던 세이클럽 개발을 리드했다. 그런 그가 블루홀을 창업한 건 게임 전문 개발자 덕분이다. 2007년 당시 엔씨소프트에서 리니지3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핵심 개발자들이 회사와의 갈등으로 퇴사해 거처를 찾고 있었는데, 장병규 의장은 이들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게임회사 블루홀을 세웠던 거다. 주요 이슈에 대해서만 의사결정을 하는 이사회 의장 자리를 맡은 것도, 전문가들에게 전권을 주기 위한 의사결정이었다. 실제로 블루홀의 실무는 김강석 전 대표가, 개발은 지금은 블루홀을 떠난 박용현 실장이 맡았다. 알토스벤처스가 블루홀에 투자한 건 2008년. 장병규 의장이 알토스벤처스의 LP로 참여한 다음 해다. 서로가 서로에게 투자한 ‘독특한 모양새’가 된 셈이다. -블루홀 얘기로 돌아가 볼게요. 장병규 의장이 투자를 요청한 건가요? 어떻게 블루홀에 투자하게 되었나요? “블루홀은 2007년에 시작됐어요. 장병규 의장의 자본으로 세워졌죠. 그리고 한 1년쯤 지나고 나서 외부 투자를 받는 데 관심이 있다면서 연락을 해왔어요. 당시 ‘테라’라는 게임을 만들고 있었는데, 글로벌 시장에서 퍼블리싱하는 대작이었던 만큼 개발비용이 적잖게 들었던 것 같아요. 투자받고 싶다는 의사를 저희 쪽에만 전달한 건 아니고, 여러 투자사를 접촉했어요.”
김범석 대표가 그러더군요. 우리가 안 하면 아마존이 들어와서 한다고, 그러면 우리는 다 망한다고요. 쿠팡은 ‘문제적 기업인가’ 2014년 미국 세쿼이아캐피탈과 블랙록 컨소시엄으로부터 각각 1억 달러(약 1123억 원), 3억 달러(약 3369억 원). 2015년 손정의 회장의 소프트뱅크로부터 10억 달러(약 1조1231억 원). 글로벌 유수의 벤처캐피탈(VC)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끌어모은 벤처기업이 있다. 5000명이 넘는 직원을 둔, 이제 스타트업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이 회사, 쿠팡이다. 투자 유치 실적만 놀라운 게 아니다. 쿠팡의 지난해 매출은 2조6846억 원. 이커머스 업계 강자로 꼽히는 SK플래닛(9915억 원)과 이베이코리아(9518억 원)를 합친 것보다 크다. 사실 이 두 회사의 쿠팡의 매출은 직접 비교하긴 힘들다. SK플래닛과 이베이코리아는 물건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주는 플랫폼 역할을 하는 오픈마켓이다 보니 거래액의 10~15% 선인 수수료가 매출로 잡히기 때문이다. 반면 쿠팡은 직접 물건을 사 배송해 거래액이 곧 매출이다. 실제로 업계에선 이베이코리아의 2017년 거래액은 15조 원 규모로, 쿠팡의 거래액은 5조 원(쿠팡 역시 오픈마켓으로 판매되는 물건이 있어 거래액은 매출보다 크다) 규모로 추산한다. 그럼에도 쿠팡의 놀라운 점은 창업한 지 만 8년밖에 안된 회사가 3조 원에 육박하는 물건을 직접 사고 보관하고 배송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세도 놀랍다. 실적이 공개된 2013년 이후 쿠팡은 매해 말 그대로 기록적인 성장률을 ‘기록’하며 덩치를 키웠다. 이 회사에 2011년 초기 투자한 VC가 있다. 한 킴 대표가 이끄는 알토스벤처스다. 알토스벤처스는 김범석 대표가 쿠팡을 설립한 지 1년 만에 투자를 결심했다. 4년 뒤 소프트뱅크는 1억 달러를 투자하며 쿠팡의 기업가치를 5조 원으로 봤다. 2018년 7월 현재 유통업계 1위 업체인 이마트의 시가총액이 6조1000억원가량인 걸 고려하면, 기업을 골라내는 알토스벤처스의 안목이 놀랍다. 하지만 이같이 놀라운 성과에도 쿠팡은 늘 ‘문제적 기업’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적자 때문이다. 적자가 늘어나는 속도가 진정되긴 했지만, 여전히 쿠팡은 남는 게 없는 장사를 하고 있다. 아니, 남는 게 없는 게 아니라 손해를 보고 있다. “매출이 많으면 뭐하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2017년 말 현재 자본금은 -2610억 원으로,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2016년만 해도 자본금 3180억 원이었지만, 지난해 6000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면서 가지고 있던 자본금을 모두 까먹고 마이너스 상태가 됐다. 2018년 1분기 유상증자를 통해 3021억 원을 확보하면서 자본잠식 상태에서는 빠져나왔지만, 적자 폭을 줄여 흑자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이 자본금도 곧 바닥을 드러낼 수 있다. 물론 자본금이 바닥나도 당장 망하는 건 아니다. 매달 엄청난 규모의 거래가 발생하고, 실제 물건값을 정산할 때까지 일정 기간 물건 판매대금을 보유하고 있어 회사 운영은 가능하다. 하지만 매출이 지금처럼 성장하지 못하면 제때 물건 대금을 정산할 수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부도 상황에 몰릴 수 있다는 얘기다. 쿠팡이 ‘위험한 성장’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건 그래서다. 한 킴 대표와 쿠팡 그리고 김범석 대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이 이야기가 빠질 순 없었다.
김범석 대표는 본인이 회사가 외부에 어떻게 보이는지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본인한테는 회사의 경영 상태, 그리고 회사의 각 구성원이 일을 어떻게 실행하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4화. 몰입과 노력...쿠팡 김범석 대표(1)’에서는 네 개의 챕터가 소개됐습니다. 1)쿠팡은 문제적 기업인가 2)혁신으로부터 시작된 '예고된 적자' 3)쿠팡이 안하면 아마존이 한다 4)김범석, 그는 누구인가 ‘5화. 몰입과 노력...쿠팡 김범석 대표(2)’에서는 나머지 네 개 챕터가 이어집니다. 5)몰입과 노력, 스펙을 넘어서다 6)쿠팡의 문화는 냉혹(harsh)하다? 7)홈런을 치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8)Editor's Note 몰입과 노력, 스펙을 넘어서다 -쿠팡을 지금처럼 키우기 전의 김범석 대표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지금의 쿠팡을 만들고도 남음 직한 대단한 사람이었나요? 아니면 똑똑하지만 평범한 사람인데 쿠팡을 통해서 성장한 건가요? “김범석 대표는 얼핏 봐도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에요. 스펙만 봐도 대단하죠. 미국에서도 유명한 사립고교를 나와서 하버드대에 진학했어요. 보스턴컨설팅그룹에서 컨설턴트로도 일했고, 창업도 해봤고요. 그러고 나서 하버드경영대학원에도 진학했죠. 그걸 그만두고 나와서 차린 게 쿠팡이에요. 그런데 김범석 대표를 스펙으로만 보면 놓치는 게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김범석 대표와 배달의민족 김봉진 대표는 닮은 점이 많아요. 사실 그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요. (※김봉진 대표는 서울예술전문대학을 나온 디자이너 출신의 창업가다) 그런데도 그 둘이 닮았다고 말하는 건 두 사람 모두 자기 발전을 위해 엄청나게 노력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어떤 노력을 그렇게 하나요? “김봉진 대표는 엄청난 다독가에요.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많이 합니다. 김범석 대표도 그래요. 특히 김범석 대표는 영상도 열심히 보는데, 저처럼 재미있는 영화나 오락 같은 걸 보는 게 아니라 정보를 찾아봐요. 이런 식이죠. 창고를 만들면 어떻게 하면 창고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까를 검색해서 봐요. 정말 늘 공부합니다. 시간을 허투루 쓰는 법이 없죠. 저는 김범석 대표를 ‘스펀지’라고 불러요. 내가 알고 있는 걸 다 빼가거든요. 자기가 완전히 이해하고 납득이 갈 때까지 계속 물어봅니다. 생각을 끝까지 밀어붙여요. 김범석 대표를 아는 사람들은 김범석 대표랑 1년 정도 일하면 알고 있는 모든 걸 다 빼앗긴다고 말할 정도예요.” -엄청난 수준의 워커홀릭일 것 같아요. “일 자체를 굉장히 즐기는 건 맞아요. 일요일 저녁이 되면 흥분된다고 하더라고요. 다음날이 월요일이라서요. 그리고 토요일이 가장 싫대요.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직원들한테 이메일을 보낼 수가 없다고요. (웃음) 말을 해놓고 보니 직원들은 조금 힘들 수도 있을 거 같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김범석 대표는 스펙이 엄청나잖아요. 창업자에게 학벌은 어떤 의미를 갖나요? 학벌이 좋으면 똑똑한 경향은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가요? “학벌이 절대적이진 않아요. 하지만 학벌이 없으면 다른 걸 더 봐야 합니다. 알토스벤처스의 경우 엔젤투자자만큼 초기에 투자하진 않으니까, 사업을 시작하고 어떤 성과를 일구었나를 보죠. 그때까지 무엇을 했는지를요. 학벌의 의미는 이런 겁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참고 어떤 것에 집중해서 일정 수준의 성과를 이뤄낸 경험이 있느냐 없느냐. ‘절제력(※한 킴 대표는 ‘discipline’이라는 단어를 썼다)이 있느냐 없느냐’라고 해야 할까요. 그럼 학벌이 좋지 않으면 투자를 하지 않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니에요. 학벌이 안 좋아도 그 뒤에 무엇을 했느냐를 봅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소위 명문대 갈 수 있는 두뇌와 절제력이 있었다면, 그걸 가지고 당신은 뭘 했느냐고 물어보는 거죠. 그런 재능을 낭비했는지, 아니면 다른 데 투자해서 뭔가를 이뤄냈는지를요.” -한국은 ‘학벌주의’가 여전히 심해서 거의 모든 사람이 고등학생 때까지는 최대한 절제하며 공부하다가 대학에 가면 공부를 탁하고 놓는 것 같아요. “학벌주의가 한국이 미국보다 더 심한 것 같긴 해요. 미국에서는 좋은 대학 나왔어도, 그 뒤 몇 년 간 무엇을 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가 학벌보다 학교를 나온 뒤 무엇을 했는지 열심히 보는 건 미국에 뿌리를 둔 VC이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소위 명문대 나와서 몇 년 간 공백이 있으면 도대체 뭐했느냐고 물어요. 그런 사람은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이 아닌 거죠.” 알토스벤처스 사무실 벽면에는 투자한 포트폴리오사들의 로고가 붙어 있다. 쿠팡의 로고도 찾을 수 있다. ⓒ폴인 -김범석 대표 이야기로 돌아올게요. 김범석 대표를 보고 감탄한 순간이 혹시 있다면? “스타트업을 하다 보면 대기업 회장님들이 밥 먹자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스타트업 대표분들 대부분이 그런 약속을 중요하게 생각하죠. 그게 예의라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언젠가 한 번 김범석 대표한테도 그런 약속이 생겼어요. 제가 중간에서 잡은 약속이었어요. 모 대기업 회장님이 저한테 전화해서 김범석 대표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약속을 잡았죠. 그런데 약속 당일날 오후 5시쯤이었나, 6시쯤이었나 전화가 왔어요, 김범석 대표한테서. 저녁 약속은 오후 6시 반이었을 거에요, 아마. 김범석 대표 말이 회의 중인데, 곧 끝날 것 같지 않다고요. 미안한데 저녁 약속에는 못 갈 것 같다고요. 그래서 그날 저녁은 저 혼자 가서 먹었어요. 제가 알기로 그 회의가 큰 이슈를 다루는 회의는 아니었어요. 일상적인 마케팅 회의였다고 알고 있어요. 김범석 대표는 그런 사람이에요. 회사 일에 꽂혀 있는 거죠. 회사 일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회사 안에서 회의하면 휴대폰은 비서한테 맡기고 들어가는 사람이에요. 외부에서 어떤 연락이 와도 방해받지 않겠다는 뜻이죠. 김범석 대표는 본인이 회사가 외부에 어떻게 보이는지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아요. 본인한테는 회사의 경영 상태, 그리고 회사의 각 구성원이 일을 어떻게 실행하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스타트업 대표 중에는 겉멋이라고 해야 하나요, 외부에서 어떻게 보이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표가 드물지 않게 있어요. 그런데 김범석 대표는 전혀 그렇지 않죠. 정말 오로지 하나만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좋은 제품을 더 싸게 가져와서 더 빨리 유통할 수 있을까, 그리하여 고객 만족을 높일 수 있을까. 정말 하루 24시간을 1년 내내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 -함께 일하는 직원은 힘들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서 종종 사람들과 부딪치기도 합니다. 성격이 급해서 그런 것도 있을 거예요. 미국에서는 사실 그런 게 문제가 안 되는 게, 그렇게 충돌하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거든요. 비즈니스 커뮤니케이션과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어요. 그런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보니까, 사람들과 부딪치는 일이 있는 것 같아요.”